서울-인천-부산-안양-제주서 8명 재심 청구...장병식 할아버지 “가족들에 처음 털어놔”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왼쪽)와 제주시 출신(일본 출생)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장병식 할아버지가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왼쪽)와 제주시 출신(일본 출생)으로 서울에 거주하는 장병식 할아버지(오른쪽)가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이렇게 만납니다. 인사나 합시다. 나 성산에 사는 김두황이요”

“난 장병식입니다. 서울에서 왔습니다”

제주4.3의 광풍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았던 생존수형인과 가족들이 70년 만에 제주에 모였다.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4.3도민연대)는 27일 사무실에서 제2차 4.3재심사건에 참여하는 생존수형인들과 공식 만남을 가졌다.

재심 청구 대상자는 김묘생(28년생.여), 김영숙(30년생.여), 김정추(31년생.여), 변연옥(29년생.여), 송순희(25년생.여), 장병식(30년생), 송석진(26년생), 김두황(28년생)씨 등 모두 8명이다.

현장에는 서울에 거주하는 장병식 할아버지가 직접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부산에 사는 김정추, 안양 변연옥, 인천의 송순희 할머니를 대신해서는 자녀와 형제자매 등 가족들이 함께했다.

제주에서는 김두황 할아버지가 직접 현장을 찾았다. 김묘생, 김영숙 할머니는 거동이 어려워 딸들이 자리를 지켰다. 송석진 할아버지는 일본에 거주해 이날 유일하게 함께하지 못했다.

장병식 할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옥살이를 했다. 출소 후 제주로 가면 다 죽는다는 얘기에 고향에 가지도 못했다”며 “공직생활을 거쳐 개인사업을 하며 이 자리까지 왔다”고 회상했다.

양동윤(왼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27일 사무실에서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오른쪽)에게 제2차 재심 청구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동윤(왼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27일 사무실에서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오른쪽)에게 제2차 재심 청구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가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서 1948년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수형생존인인 서귀포시 성산 출신 김두황 할아버지가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서 1948년 4.3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그러면서 “4.3사건 후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빨갱이 소리에 놀라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내가 겪은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며 “재심 청구를 앞두고 이제는 모두 털어놨다”고 말했다.

장 할아버지는 “4.3이야기를 듣고 외국에 있는 우리 딸이 가장 많이 놀랐다”며 “이제 시간이 없다. 더 늦게 전에 잘못된 것들을 제 자리에 돌려놓고 싶다. 너무 억울하다”고 강조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장 할아버지는 제주시 중앙로 한짓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던 1948년 남문통에서 서북청년단에 끌려 가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매질을 당했다.

죄명과 영문도 모른 채 법원에 끌려갔지만 인정심문 등 제대로 된 재판 절차도 없이 곧바로 배에 올라 목포로 향했다. 이후 인천형무소로 이끌려 가 1년간 복역했다.

김두황 할아버지는 경찰 하부조직인 민보단 활동을 하다 1948년 경찰에 붙잡혔다. 폭도로 내몰려 모진 고문을 당했다. 김 할아버지는 내란죄로 일반재판을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1년간 지냈다.

1949년 만기 출소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예비검속에 휘말렸다. 당시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70년째 폭도라는 낙인이 김 할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아직도 전과자 기록이 남아 있다”며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더 늦기 전에 재판을 통해 반드시 억울함을 풀고 싶다”고 말했다.

이날 현장에 참석한 7명의 수형생존인과 가족들은 4.3관련 재심 청구에 적극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소송은 사상 첫 4.3재심 공소기각 판결을 이끈 4.3도민연대에 일임하기로 했다.

제주4.3사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인 수형생존인과 가족들이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 처음 만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사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인 수형생존인과 가족들이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 처음 만나 의견을 나누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동윤(왼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27일 사무실에서 제주4.3수형생존인인 제주 출신 장병식 할아버지(오른쪽)에게 제2차 재심 청구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동윤(왼쪽)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대표가 27일 사무실에서 제주4.3수형생존인인 제주 출신 장병식 할아버지(오른쪽)에게 제2차 재심 청구 과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8명의 생존수형인 모두 불법 구금 돼 고문까지 당한 분들”이라며 “합법적인 재판도 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감옥까지 가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양 대표는 “1차 재심에서도 공소기각과 형사보상 결정이 내려졌다”며 “이번 소송은 1년 반이면 끝이 날 것으로 보인다”며 “고령인 생존수형인을 위해 4.3도민연대가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

생존수형인은 1948~1949년 군법회의를 통해 불법 구금돼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된 피해자들이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많게는 20년간 옥살이를 했다. 수형인명부 인원만 2530명에 달한다.

4.3생존수형인 18명에 대한 역사적 재심 청구는 2017년 4월19일 이뤄졌다. 법원은 2018년 9월3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리고 올해 1월17일에 사실상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판결을 했다.

법원은 올해 8월21일 생존수형인들이 청구한 형사보상까지 받아들였다. 법원이 인용한 보상액은 최저 8000만원, 최고 14억7000만원 등 모두 53억4000만원에 이른다.

1차 생존수형인들은 재심 공소기각과 형사보상 결정에 이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 추가로 제기하기로 했다.

이보다 앞선 10월15일을 전후해 2차 생존수형인 8명에 대한 사상 두 번째 4.3관련 재심 청구가 이뤄진다. 소송은 대리인은 법무법인 해마루의 임재성, 김세은 변호사가 맡기로 했다.

제주4.3사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인 수형생존인과 가족들이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 처음 만나 재심 청구 과정을 확인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제주4.3사건 재심 청구를 준비중인 수형생존인과 가족들이 27일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실에 처음 만나 재심 청구 과정을 확인하고 있다. ⓒ제주의소리 [김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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