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주 할아버지, 유족회에 보상금 기부
문 서장 예비검속 총살 지시 거부로 생존

강순주 할아버지가 2021년 6월 [제주의소리]와 진행된 한국전쟁 71주년 기념 인터뷰식에서 문형순 서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당시 취재기자에게 문 서장의 공적을 도민들이 알 수 있도록 자신보다 더 이야기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강순주 할아버지가 2021년 6월 [제주의소리]와 진행된 한국전쟁 71주년 기념 인터뷰식에서 문형순 서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당시 취재기자에게 문 서장의 공적을 도민들이 알 수 있도록 자신보다 더 이야기를 많이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제주4.3과 예비검속으로 생사를 넘나든 90대가 국가보상금을 기부해 감동을 주고 있다. 경찰영웅인 故 문형순 서장과의 인연까지 알려져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18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4.3 생존희생자인 강순주(91) 할아버지가 아들 강경돈씨를 통해 4.3의 위인을 위해 사용해 달라며 국가보상금 1000만원을 유족회에 기부했다.

기구한 인생사를 품은 강 할아버지는 1932년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태어났다. 세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일본으로 넘어갔다 해방 후 다시 고향 제주로 돌아왔다.

철부지 소년 시절이던 1948년 꿩을 잡으러 가시리 중산간을 돌아다니다 마을이 불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영문도 모른 채 잔뜩 겁에 질려 우선 몸을 피했다.

군경의 대대적인 강경 진압활동인 일명 ‘초토화작전’이었다. 강 할아버지는 산에 숨어 있다가 결국 토벌대에 붙잡혔다. 모진 고문을 받았지만 혐의점이 없어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사이 불에 탄 가시리 마을은 폐허로 변해 있었다. 군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을을 재차 훑으며 사람들을 또다시 연행했다. 포박된 행렬에는 강 할아버지도 포함돼 있었다.

2018년 11월1일 제주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2018년 11월1일 제주경찰청에서 故문형순(1897~1966.경감) 전 모슬포경찰서장에 대한 추모흉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성산포경찰서로 잡혀가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느닷없이 풀려났다. 당시 강 할아버지를 집으로 돌려보낸 지휘관이 다름 아닌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이었다.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항일무장 독립운동을 펼쳤던 문 서장은 광복 후 경찰 신분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다 제주까지 내려왔다. 1947년 7월 제주경찰서 기동대장을 거쳐 한림지서장과 모슬포경찰서장, 성산포경찰서장을 지냈다.

1949년 1월 모슬경찰서장 당시 군경이 대정읍 하모리 좌익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100여명의 명단을 압수, 다수가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이들의 자수를 권유하기도 했다. 

이듬해 성산포경찰서장이 된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 주민들에 대한 군 당국의 학살 명령을 거부했다. 읍면별로 수백명씩 목숨을 잃었지만 성산읍 희생자는 6명에 불과했다.

6.25 당시 ‘적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검거하라는 이른바 예비검속이 시작됐지만 그는 총살 명령에 ‘부당(不當)하므로 불이행(不履行)’이라고 맞서 대량학살을 막았다.

석방되는 강 할아버지를 향해 문 서장은 “나한테 고맙게 생각하지 말아라. 모두 하늘의 뜻이다. 나가거든 사회에 착실하게 적응하면서 나라를 위해 살아줬으면 한다”는 말을 건넸다.

1950년대 삼성혈 삼성전 앞에서 찍은 문형순 서장의 사진. 오른쪽 끝 안경을 쓴 사람이 문형순 서장이다.
1950년대 삼성혈 삼성전 앞에서 찍은 문형순 서장의 사진. 오른쪽 끝 안경을 쓴 사람이 문형순 서장이다.

당시 강 할아버지의 나이는 만 19세였다. 석방 후에도 빨갱이로 낙인 찍힌 강 할아버지는 문 서장의 말을 되새기고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해 1952년 전장에 뛰어들어 한국전쟁을 치렀다.

문 서장은 퇴직후 대한극장에서 매표원으로 일하다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후손 없이 생을 마쳤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서장의 희생 정신을 기려 경찰 영웅으로 선정했다.

강 할아버지는 자신을 목숨을 지켜 준 문 서장을 위해 업적 발굴에 힘써왔다. 4년 전 경찰의날 기념식에서는 자손이 없는 문 전 서장을 대신해 경찰영웅상을 대리 수상하기도 했다.

그동안 제주시 아라동 산천단 평안도민공동묘지에 있는 문 서장의 묘소를 찾아 남몰래 주변 정리를 하고 제사도 지내고 있다. 문 서장의 기일은 양력 6월20일이다.

강 할아버지는 “문 서장 덕분에 나는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났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불의에 항명하며 도민들을 살려낸 분이다. 이 얼마나 거룩하냐”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내가 군대 갈 때도 문 서장의 영향이 컸다. 내 삶의 지표가 되신 훌륭한 분”이라며 “나는 호국원으로 가겠지만 그분은 갈 곳이 없다.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4·3 생존희생자인 강순주(91) 할아버지의 아들 강경돈씨가 18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를 방문해 국가보상금 1000만원을 기부했다.
4·3 생존희생자인 강순주(91) 할아버지의 아들 강경돈씨(오른쪽)가 18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를 방문해 오임종 유족회장(왼쪽)에게 국가보상금 1000만원을 기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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