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때 뒤틀린 가족 찾기 나선 제주 사람들] ⑤한재우(57)씨

“큰아들과 며느리, 눈 한번 떠보지 못하고 죽은 손자를 잃은 그의 절절함을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날까지 잃어버린 자식새끼, 며느리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던 할머니였어요”
눈 감는 날까지 큰아들과 며느리, 세상에 나오기도 전 숨통이 끊긴 손자를 절절하게 부르짖던 그. 할머니의 못 다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한재우씨(57)가 가족 관계 정정에 나섰다.
최근 제주시 조천읍 북촌의 한 가정주택에서 만난 한씨와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고완순 전 북촌리4.3유족회장은 그날의 참혹한 참상을 상기시켰다.
1949년 1월17일(음력 1948년 12월19일)의 일이었다. 함덕리에 주둔하던 2연대 3대대는 아침 8시쯤 수백명의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강제 집결시켰다.
고 전 회장은 운동장에 난생처음 보는,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쇳덩어리들이 운동장에 쌓여있었다고 했다.
교단에 올라선 간부는 주민들을 일렬로 세운 뒤 그들에게 총구를 겨눴다. 극도로 치달은 공포 속 적막을 깨는 총소리가 나자, 주민들은 혼비백산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총알이 터지는 소리와 ‘땅에 머리 박아라, 머리 박아라’하는 외침만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한참 뒤 총소리가 멎은 것은 이미 수백명이 목숨을 잃은 후였다.
군인들은 살아남은 주민들을 동과 서로 가른 뒤 옴팡밭과 당팥에 끌고 가 무차별적인 학살을 이어갔다.
고 회장은 죽음의 문턱을 비껴갔지만, 한씨의 큰어머니 이두열(1929~1949)은 그렇지 못했다. 당시 나이 20살의 일이었다. 큰어머니는 뱃속에 밴 2개월 난 아기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함께 끌려간 큰아버지 한중섭(1929~?)은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쓴 채 인천형무소에 수감됐으나, 그 뒤로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큰어머니는 운동장 내 차가운 시신 더미에서 발견됐다. 할머니가 숨이 끊어진 그를 등에 지고 나오던 찰나, 군인이 총부리를 그의 가슴에 댔다. 끝이구나 싶었지만, 할머니는 “먹는 물에 시신물 갈카 부댄 치웜수다(먹는 물에 시신 물 갈까봐 치우고 있다)”고 말한 끝에 겨우 죽을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인근 밭으로 간 할머니는 살갗이 까지는 줄도 모른 채 맨손으로 박박 땅을 긁어냈다. 지나가는 사람을 무작정 붙잡아 땅을 파달라고 애원했다. 할머니는 큰어머니의 시신을 묻고 나서야 참아왔던 울음을 목 놓아 터뜨렸다.


한씨는 어릴 적부터 새해가 되면 세배하러 찾았던 집안이 있었다. 먼 친척인 줄만 알았지만, 당시 할머니와 함께 큰어머니의 토롱을 도왔던 어르신의 집안이었다.
할머니는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그의 집안을 찾아 평생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씨가 어떤 친척이냐 물으면 “나 죽어도 꼭 잊어버리지 말고 찾아가야 한다”하고 신신당부만 했다. 할머니는 생사를 오가는 상황 속 당시의 은혜를 잊지 못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할머니는 걸핏하면 한씨에게 얼굴도 알지 못하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한씨는 “할머니는 4.3때 돌아가신 큰아들(한중섭)을 두고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지극정성으로 부모를 대하는 효자라고 자주 말했다”며 “할머니가 1997년 만 100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늘 먼저 생사를 달리한 큰아버지의 얘기를 했다”고 회상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4.3의 비극을 들었지만 한씨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한날한시에 이집 저집에서 제사를 지내니 떡이 넘쳐났기에 넉넉지 못한 형편에도 그날만큼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로 기억할 뿐이었다.
한씨가 성인이 될 때쯤 국가폭력에 의한 4.3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대학에 진학하며 여기저기서 4.3의 비참함을 간접적으로 보고 들으며 할머니가 이야기하던 게 또렷하게 다가왔다.
시집 와 호적에 올릴 새 없이 희생당한 큰어머니의 제사와 분묘 관리는 모두 할머니와 어머니의 몫이었다. 몇해 전부터는 한씨가 그 몫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큰어머니는 70여년째 한씨 집안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씨는 “고 전 회장이 아흔을 바라보는 어르신들을 보증인으로 세워 뒤틀린 가족관계를 정정한다는 이야길 듣고 한걸음에 찾아와 대대로 내려져오는 족보와 큰어머니 집안으로부터 받은 토지대장을 전해줬다”며 “호적에는 없어도 족보에는 큰어머니가 한자 이름 석자가 분명히 들어가 있다”고 설명했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사실혼 관계인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더 있다. 제사를 도맡은 것에 감사하다며 큰어머니 친정에서 한씨 집안으로 밭을 명의 이전해준 것이다.
한씨는 “큰어머니가 1949년에 돌아가신 뒤 1980년도까지 할머니와 어머니가 제사를 지냈다”며 “큰어머니 친정에서 미안했는지 밭을 선물해줬다. 부부가 아니었다면 설명하기 어려운 일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한씨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다. 형용할 수 없을만큼 비참한 학살을 자행하며 가족을 앗아간 국가가 이제라도 가족을 되찾아주는 것.
한씨는 “지식인들은 이념이 있다고 하지만, 낫 놓고 ㄱ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이데올로기가 있겠느냐”며 “그저 밭에서 검질 매고, 바다에서 물질하던 선량한 사람들 잡아다가 죽인 것”이라고 흐느꼈다.
그러면서 “큰어머니 뱃속의 아이가 살아있다면 듬직한 사촌형, 사촌누나가 됐을 것인데 눈 떠보지도 못한 채 운명을 달리해 참담하다”며 “이제라도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을 수 있다면 할머니의 한이 조금은 풀릴 것 같다. 할머니의 못 다한 소원을 국가가 꼭 이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