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시선] 지방정부에 재정부담 떠넘기기 옳지 않다 / 김봉현 이사‧논설주간

한탄스럽다. 곳간 열쇠를 꽉 쥐고 발을 빼는 정부의 모습이 볼썽사나워 하는 소리다. 국립기관으로 5월부터 공식 출범 예정인 4·3트라우마센터에 대해 정부가 제주특별자치도에 재정부담을 떠넘기려 하고 있다. 아픈 자식을 그느르는 것은 부모의 본분일진대 그 의무를 내버리는 꼴이 볼썽사납단 소리다.
정부는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 치유센터를 5월부터 개원했다. 5·18 광주민주항쟁과 제주4·3 관련 희생자 및 유가족, 그 외 국가사업에 의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trauma,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유를 담당하는 국립기관이다. 본원은 광주, 분원은 제주에 둔다고 한다.
제주의 경우 2020년 5월부터 제주자치도가 제주4·3 피해자들을 위해 4.3평화재단 산하에 문을 연 제주4·3트라우마센터가 시범운영을 끝내고,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제주 분원’으로 본격 새 출발 하는 셈이다. 5월 31일이 시범사업 종료 시점이지만, 공식적 국립기관으로서의 법적 지위가 부여됐다.
그러나 ‘시범운영보다 못한 국립기관 출범’이란 지적이 바로 쏟아진다. 제주분원 개소 가시밭길, 무늬만 국립기관, 반쪽짜리 국립기관 전락, 불안한 트라우마센터, 출발부터 삐걱…. 국립기관 지정이란 반가운 기별이 무색한 4·3트라우마센터의 출범을 바라보는 언론 기사들이다.
정부는 올해 국립기관으로 출범하는 제주4·3트라우마센터 예산을 17억 원으로 예상했다. 물론 전액 국비로 충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곳간 열쇠를 쥔 기획재정부가 이를 틀었다. 기재부는 17억 원 예산을 12억6000만 원으로 대폭 삭감했다. 그마저도 국비와 도비를 절반씩 부담하도록 수정했다.
트라우마치유센터법 제18조에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치유센터의 설립 및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예산의 범위에서 출연 또는 보조할 수 있다’는 규정을 들어 예산을 쳐낸 것이다. “보조할 수 있다”는 근거를 들어 국립기관 첫 출발부터 온전하게 책임져야 할 국가의 직무를 유기한 떠넘기기의 극치다.
결국 제주4·3트라우마센터의 올해 예산은 국비와 도비 절반씩 합쳐 12억6000만원에 그쳤다. 인원은 센터장 포함 12명. 국립기관 승격으로 기대했던 센터 인력 확대는 언감생심이 됐다. 운영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지금의 예산이라면 9월 전후로 센터 활동도 멈출 위기다. 무늬만 국립기관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지방정부가 출연금을 내어 시범운영하고 그 성과와 필요성을 인정받아 국립기관으로 승격됐다. 국립기관 승격은 반가운 기별이나 앉은벼락도 유분수지, 국가기관의 첫걸음부터 운영 책임과 재정 부담을 지자체 떠넘기는 행태는 속히 멈춰야 한다.
제주4·3트라우마센터 태동은 문재인 정부에서 시작됐다. 지난 ‘2018년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서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라는 VIP 추념사에서 싹을 틔웠다. 4·3 71주년, 72주년, 73주년 등 매년 대통령의 반복된 메시지로 국립트라우마센터 건립을 국가가 굳건히 약속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당선자 시절인 지난 2022년 제74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보수 정당 출신 대통령이나 당선자로서는 처음 참석해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바로 우리의 책임이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4·3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온전한 명예 회복은 물론 생존 희생자들의 아픔과 힘든 시간을 이겨내 온 유가족들의 삶과 아픔도 국가가 책임 있게 어루만질 것이라고도 윤 대통령 스스로 단언했다.
말만 요란한 것인가. 윤석열 정부가 여전히 과거 관선 시대처럼 지방정부를 중앙정부의 단순 하부기관쯤으로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국립기관 지정이라는 시혜를 베풀었으니 관리는 지방정부가 알아서 하라는 떠넘기기 행태인가. 재정이 열악한 지방정부에게, 그것도 국가폭력에 의한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국립기관 운영 예산을 지자체에 전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참에 제주4·3과 광주5·18을 두고 본원과 분원 구별로 국가기관 체급(?)을 나누는 것도 시정돼야 한다. 국립 4·3트라우마센터, 국립 5·18트라우마센터가 되어야 한다. 참상의 성격과 규모, 희생자와 유족의 수 등 무엇을 따지더라도 제주4·3트라우마센터가 국립 국가폭력트라우마치유센터 ‘제주 분원’이 되는 것은 옳지 않다.
4·3은 대한민국 역사다.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고 소중한 이들을 잃은 통한을 그리움으로 견뎌온 제주도민과 제주의 역사 앞에 숙연해지겠다고 윤석열 정부 스스로 약속했다. 짙게 드리운 국가폭력의 그늘을 밝힐 책임과 역할은 국가에 있다. 지금이라도 진력을 쏟아 도리를 다하라. / 김봉현 이사‧논설주간
